알고 보면 우리 주위에는 산이 참 많다. 산은 우리를 빙 둘러쌓아 우리 사는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지리산을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작년 이맘 때였다. 혼자서, 그것도 겨울에 지리산을 가야할 다른 이유는 없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마음으로 정한 일이다.
그 날은 여는 금요일 보다 마음이 바빴다. 서둘러 업무를 마무리 지어야만 지리산에 가는 버스시간에 닿을 수 있다. 네이버를 뒤져보니 강변터미널에 가면 함양을 거쳐 백무동까지 들어가는 버스가 있다고 했다. 버스에 타기만 하면 지리산까지 편안하게 모셔다 준다니 편리한 세상이다. 대학 때 지리산에 가려면 내 덩치만한 배낭을 둘러매고 서울역으로 가야했다. 대게 밤차를 타고 남원이나 구례구까지 내려가서 다시 지리산 입구까지 들어가는 완행버스 첫차가 올 때까지 낡은 터미널에서 오들오들 떨곤 했다. 내가 타려는 우등 고속버스는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함양까지 3시간 몇 분에 끊는다고 한다. 버스에도 커다란 글씨로 '지리산고속버스'이라 적혀 있었다. 서울에서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에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철 지난 등산이라 버스도 썰렁하려니 생각했는데 의외로 만석이었다. 게다가 달리는 차안에서도 끊이지 않는 디지털위성방송 덕분에 선명하고 쩌렁쩌렁한 뉴스가 연신 쏟아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조금 멀어지고자 하는 바람으로 떠나는 여행인데, 세상은 지리산 끝자락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기세이다.
얼마 쯤 달렸을까 버스는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국도로 접어들었다. 컴컴한 도로 위에는 차도 드물었다. 저만치 '함양'라고 적힌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함양이면 경상남도이다. 함양 내리실 분 나오셔요. 대부분 승객들이 여기가 목적지인지 주섬주섬 가방을 집고 일어섰다. 아저씨! 백무동 가는데 방 있겠죠? 기사님께 여쭤보니, 이 시간에는 백무동까지 올라가봤자 방 잡기가 수월치 않을 텐데 하신다. 차라리 인월에 내려 하룻밤 묵고 내일 아침 올라가는 게 수월하다고 하셨다. 기사님 말대로 컴컴한 정류장에 나 혼자 내렸다. 바로 전에 정차한 함양은 분명 경상남도였는데, 인월은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이라 적혀있다. 그럼 그 경계쯤 사는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를 쓸까? 아니면 경상도 사투리를 쓸까?
자정이 가까운 시간 인월 시내는 무슨 60년 대 영화세트 같은 모습이었다. 적막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거리에 애써 시선을 끌고 있는 건 시뻘건 네온사인으로 치장된 여관과 슈퍼마켓 몇 개의 간판뿐이다. 서부영화의 낯선 이방인 같은 걸음걸이로 휑한 거리를 가로질러 슈퍼로 들어갔다. 새벽 산행에 필요한 먹을거리를 주섬주섬 담았다. 햇반. 삼양라면. 귤 5개. 우유. 미니허쉬 초콜릿. 소시지. 굶어 죽을까봐 겁이 났는지 보는 족족 손이 갔다. 전쟁터에 가기 전 군장을 싸는 심정으로 배낭에 밀어 넣었다.
그저 그런 모텔 중에 그럴싸한 하나를 골라 걸음을 재촉했다. 온갖 눈속임을 해대는 대도시의 모텔에 비해 지방 중소도시에는 그럴 염려를 덜어도 된다. 여기 사람처럼 순박한 여관도 더러 있어서, 화려한 외관보다는 기본에 충실하여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해준다. 이번 선택도 나쁘지는 않았다. TV도 틀어보지 않고, 일찍 불을 껐다. 몸은 먼 거리를 달려온 덕에 지쳐있었지만, 잠을 원하지 않았다. 창을 열고 산을 바라봤다. 우유를 꺼내 지리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산바람과 함께 한 모금 들이켰다. 산 위에 머물고 있는 온갖 동식물들의 냄새가 바람과 섞여 비릿한 맛이 났다. 내일 아침에는 나도 저기에 간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다시 불을 껐다.
아침이 밝았다. 인월터미널로 갔다. 백무동 들어가는 버스시간표를 보니, 첫차가 방금 출발했단다. 다음 차는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 낭패다. 여기서 한 시간을 뭉개면 산에서 몇 킬로를 뒤지는 꼴이다. 간밤에 인월에서 묵은 보람도 없어진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찻길을 건너보니 사람들이 모여 있다. 장이 섰나 보다. 간밤에 다들 어디에 몸을 숨겨놓았다가 날이 밝자 쏟아져 나왔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시골장터에는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들고 나온 나물과 약재를 팔고, 곶감도 팔고, 마늘도 팔고 있다. 사람구경, 시장구경을 하다가 저만치 등산객을 보았다. 등산복을 화사하게 차려입으신 할아버지 두 분이 택시에 올라타는 것이 아닌가. 택시! 시장을 빠져나가는 택시를 겨우 잡았다. 백무동 가셔요? 기사는 반가워하며 만원만 받을 테니 어서 타라는 손짓이다. 얼씨구나 택시에 올라탔다. 얼떨결에 합승한 덕분에 경제적인 가격으로 백무동 지리산 입구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예기치 못한 손님에게 한 자리를 뺏긴 두 분 할아버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택시기사와 신경전을 벌였다. 모르긴 해도 합승한 만큼 부당이득을 분배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 오고 갔다. 약간 불편한 기운도 산자락에 접어들자 눈 녹듯 사라지고, 이내 지리산 안팎의 이런 저런 화제를 옮겨 다니며 이야기가 무르익었다. 알고 보니 이 할아버지 두 분은 보통 등산객이 아니었다. 근방의 택시기사 중에서 두 양반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지리산에서는 꽤나 유명하신 분이었다. 바로 지리산 정상을 400번 등반하신 호남대학교 김상원 고문님과 전남대학교 문영식 교수님이 바로 그 분들이셨다. 올 해 일흔이 되신 김고문님의 이야기는 얼마 전 중앙일보에 보도되기도 했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895977) 지리산매니아답게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인사를 나누고는 벌써 저만치 앞질러 가셨다. 70세가 되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선선히 산을 올라가시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산행 내내 여운이 되어 가슴에 남았다.
(산행시작)
12월 15일까지는 산불방지기간이라 개방된 탐방로만 입산이 허용되어 있다. 전체 탐방로 중에서 절반이 받혀 있는 셈이다. 내가 선택한 등산로는 백무동으로 올라가 장터목산장에 거쳐 천왕봉 정상에 오르는 코스이다. 하산길은 다시 장터목에서 1박을 하고 중산리로 내려오는 길을 선택할 생각이다. 중산리로 내려오면 진주로 가야 하지만, 겨울에도 별 탈 없이 내려올 수 있는 무난한 코스이다. 할아버지 일행을 앞서 보낸 뒤, 적막한 산행을 시작했다. 일월에서 아침을 든든히 먹기를 잘 했다. 속도 편하고 컨디션도 좋다. 간밤에 쌓인 피로도 새벽 맑은 산 공기를 들이마시니 모두 날아가 버렸다. 백무동 지리산관리소를 지나 한두 시간쯤 올라가니 간간히 다른 등산객들과 조우했다. 안녕하셔요! 수고 많으십니다. 잠시 스쳐가는 짧은 인연이지만 모두들 기를 쓰고 인사를 한다. 반가워서이다. 힘든 표정이라도 지어보이면 이제 다 왔다고 악의 없는 거짓말로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하고, 초콜릿을 건네주시기도 한다. 걱정했던 등산화는 불편하지 않았다. 신은 지 오래되어 뻣뻣하게 굳어버린 내 등산화 대신 아빠 등산화를 빌렸다. 중턱까지는 쌓인 눈이 없어서 아이젠 없이도 거뜬했다. 장터목이 가까워지자 기후가 급변했다.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는 순간 팀 버튼의 영화처럼 지리산은 금세 한 겨울이 되어 버렸다. 하늘에는 구름이 몰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새 눈발이 날렸다. 눈이 온다던 일기예보는 없었는데, 여기는 예보불능지역이다. 옷깃을 바짝 여미고, 장터목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을 잘 타는 사람은 빨리 오르는 사람이 아니다. 꾸준히 올라가는 사람이다. 여간해서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르는 길은 힘들고 지루하다. 요령이 통하지 않는다. 그냥 오르는 수밖에 없다. 가다보면 목적지가 나타난다. 다섯 시간을 올라갔다. 비록 다리는 아프지만, 오를수록 모습을 바꾸는 산의 풍경에 눈이 즐거웠다. 오를수록 세상에서 멀어지고, 머리는 맑아졌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눈꽃이 활짝 핀 나무로 가득 찬 숲이 나타났다. 난 단지 몇 시간을 참았을 뿐인데, 여기는 발아래 속세와는 생판 다른 세상이었다.
(장터목산장)
눈꽃 핀 나무가 다칠라 조심스럽게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저만치 눈에 가득 덮인 아늑한 오두막 한 채가 나타났다. 저기가 장터목산장이다. 나를 앞질러 갔던 등산객들은 벌써 자리를 잡고 펄펄 끓는 물에 라면을 넣고 있다. 그들 못지않게 배가 고팠지만, 잠자리가 먼저였다. 산장지기를 찾아 오늘 밤 묵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 눈을 크게 뜨고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을 안 하면 숙박할 수 없단다. CGV에 영화보러 온 것도 아닌데, 지리산 꼭대기에 무슨 인터넷 예약이란 말인가? 철두철미한 문명의 이기가 얄미웠다. 정상에서 제일 가까운 장터목산장은 1년 내내 만원사례이니 최소 2주 전에는 예약을 해야 잠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물어보지도 않은 부연설명에 열심이다. 사정한다고 해서 들어 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미 해가 지고 난 뒤거나, 눈보라가 몰아치는 경우라면 모를까. 하산길과 소요시간을 여쭤보니 아직은 충분하니 여기서 점심이나 든든히 챙겨 먹으라고 하신다.
주말 등산객으로 꽉 찬 취사장에 비집고 들어가 배낭을 내려놓았다. 할아버지 일행이 계신가 둘러보았지만, 이미 장터목을 떠난 뒤인가 보다. 라면 물을 기르러 샘터로 내려갔다. 식수가 나온다는 샘터는 산장에서도 다시 한참을 거슬러 내려가야 했다. 겨우 찾아내긴 했지만, 물 한 방울 나오지 않고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여기 가보라던 등산객을 원망하며 산장에 돌아가 생수를 샀다. 만약 생수라도 떨어졌다면 생라면을 씹어 먹던지, 아니면 눈을 녹여 그 물에 라면을 끓여 먹어야 했을 것이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라면 스프와 함께 미리 준비한 가래떡과 햇반을 함께 넣었다. 마지막으로 치즈 한 장도 올려놓았다. 외로운 등산객의 애용식 '떡라면죽'이다. 산에서는 자갈을 씹어도 맛있다더니 내가 끓인 라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맛이 좋다. 이 정도면 정상을 갔다가 산을 내려갈 때까지 충분한 칼로리이다.
(정상과 하산길)
지리산 정상 천왕봉은 장터목에서 다시 한 시간 남짓을 올라가야 한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바람은 날카롭게 날이 서있다. 천왕봉을 처음 올랐던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이다. 정상에서 느끼는 감격은 그 산행이 얼마나 고되었는가에 정확하게 비례한다. 길에 가다 우연히 천만원 뭉칫돈을 주운 사람이 느끼는 기쁨과 1년 내내 하루도 못 쉬고 땀 흘러 벌어 모은 천만원의 가치는 엄연히 다르다. 그 해 겨울 우리 일행은 화엄사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해서 3일 밤낮을 산과 씨름을 하고서야 천왕봉에 다다를 수 있었다. '지리산 천왕봉'이라 적힌 둥그런 바위를 붙잡고 느끼던 감격은 실로 대단했다. 부지런한 등산객들은 이미 정상을 점령하고 있었다. 1박이 어렵다면 서둘러 하산하는 수밖에 없다. 처음 계획대로 하산길은 중산리로 잡았다. 중산리 코스는 바위가 많기로 유명하다. 다리 근육도 이제 지쳤는지 돌을 밞을 때마다 후들거렸다. 역시 당일 코스는 무리이다.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신었던 아이젠도 돌길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두세 시간을 내려가니 칼바위에 도착했다. 무슨 전설에 나옴직한 칼 모양으로 날카롭게 서있는 바위를 바라보며 지도를 펼쳤다. 내려오면서 급한 마음에 먹었던 빵과 과자가 언치었는지 아니면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자니 그런지 속이 답답했다. 해는 벌써 기울어지려고 폼을 잡을 잡는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어려운 코스는 없다. 하지만, 랜턴도 없는데 자칫 길에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미치니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산에서의 대부분의 사고는 하산길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산을 내려갈 때는 속도를 내기 쉬워 엉뚱한 길을 잘못 들어선다고 한다. 또 정상도 이미 갔다 왔겠다 하는 마음에 긴장도 풀리기 쉽고, 체력도 대부분 소진되었기 때문에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한다. 게다가 체중이 실린 채 미끄러지거나 발을 헛디디면 의외로 큰 부상을 얻을 수 있다.
중산리로 내려와 진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만치 붉은 무언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다가가서 주인어른에게 뭐냐고 여쭤보니, 반건시란다. 곶감과 홍시의 중간쯤 되는데 이렇게 지리산 산바람을 며칠 쐬도록 걸어 놓으면 맛이 기막히다고 하셨다. 하나 집어 주시길래 먹어보니 뒷맛이 아직 떨떠름하지만 맛있었다. 반건시를 몇 개 사서 버스에 탔다.
(겨울 산의 tip)
이번 산행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겨울산행 가기 전에 챙겨야 할 준비물이 어찌나 많은지 다 준비하다가는 그냥 봄이 올 지경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산악장비부터 의류까지 그 종류가 심상치 않다. 나처럼 남들 가는 시간에 많이 가는 코스를 택하는 안전산행주의자라면 상식적인 수준에서 준비를 해도 무난하리라 생각한다. 다만, 겨울산에서 산악장비보다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체력이다. 변화무상한 날씨를 견디어 내려면 체력안배가 중요하다. 1시간을 오르면 10분 정도는 쉬는 밸런스를 유지해야 한다. 쉴 때도 땀이 난다고 옷을 훌러덩 벗으면 안 된다. 특히 겨울철에는 반드시 겉옷을 입어 체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겨울산행에서 제일 무서운 병은 저체온증이라고 했다. 가급적 옷을 여러 겹 겹쳐 입고 옷과 장갑이 젖지 않도록 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