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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지퍼 클레임
Biz Diary/A×× | 2007/02/22 10:37
설을 며칠 앞두고 P사로부터 클레임이 걸렸다.

재작년 이맘때 즈음 거래를 시작한 P사는 최근 A☓☓의 비즈니스에서 매출 비중이 가장 높은 거래처로 성장한 중요한 고객이다. 당연히 올 해 우리가 P사에게 기대하고 있는 숫자 또한 상당하다.

P사와의 거래에 있어서 지금까지 이렇다 할 사고 없이 끌고 온 것이 신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P사의 오더는 몇 번 더 신경을 쓰고 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문제가 터진 것이다.

클레임 내용은 가방 메인 지퍼의 작동에 하자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가 제기된 제품은 2가지 컬러로 제작된 10,000개짜리 PVC 핸드백이다. 조그만 파우치도 아니고, 가방치고는 적지 않은 수량이다.


긴급 소집된 대책회의에서 문제의 원인과 대처방안을 논의하였다.

표면적인 원인으로는 가방의 메인지퍼 불량이 지적되었다.

물건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가방인데, 온 힘을 기울여야 열릴 정도로 지퍼가 뻑뻑하다면, 제품의 기능적인 가치는 상실했다고 보아야 한다.

가방에 사용되는 수많은 자재 중에서 지퍼를 적은 소요량에도 메인자재 축에 넣는 까닭도 그 역할의 중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고를 단순하게 자재 불량 탓으로 돌리는 것은 교통사고 환자에게 파스와 1회용 밴드만을 처방하고 퇴원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

MRI도 찍고 CT촬영도 해봐야만 이번 클레임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


이번 사고는 총체적 부실의 결과물이라 진단할 수 있었다.

물론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제공에 대한 책임은 불량자재를 공급한 자재업체와 이를 확인하지도 않고 곧바로 생산에 투입한 자재담당에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을 면밀히 진찰해보면 이 외에도 몇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가방에 생명을 불어넣는 디자인과정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저가-대량생산의 특징을 갖고 있는 판촉용 가방의 디자인에서 철지퍼는 피해야한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럼에도 디자인팀에서 이를 어긴 것은 메탈느낌을 살리고 싶다는 고객의 요청 때문이었다. 물론, 고객이 원하는 것은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최우선순위에 두고 일을 진행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무게중심은 우리가 잡고 있어야 한다. 지나치게 고객에게 휘둘려 제품의 품질이 떨어지는 것을 간과하는 것은 고객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생산한 제품이 고객의 매출을 증대시키는 본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결국 고객의 아까운 돈만 날리고 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 조금만 더 염두에 두었다면 마땅히 나일론지퍼로 교체하도록 고객을 설득했을 것이다.


생산관리에서도 허점이 있었다. 디자인이 확정된 제품이 하자 없이 생산되느냐에 대한 책임은 생산관리에서 맡고 있다. 대개의 경우 제품의 완성도 테스트는 생산라인의 끝자리에 앉아있는 포장반에서 맡고 있다.

공장측 인력이 넉넉하거나 생산일정의 여유가 있는 경우는 별도의 검수반을 두기도 하지만, 요즘은 중국에서도 이런 공장은 눈을 씻어도 찾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제품을 박스에 담기 전에 반드시 지퍼를 열고 닫아야 하는 포장반 여공의 날카로운 손놀림이 이런 큰 하자를 놓쳤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 보다는 촉박한 납기에 떠밀려 긴가민가하면서 실어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빠듯한 생산일정에 맞춰 라인마다 매일 수백 개의 물량을 쏟아 내야 하는 공장의 입장에서 볼 때도 자재 불량은 달갑지 않은 악재인 것이 사실이다. 하나의 라인을 정지하게 되면 다른 자재가 입고될 때까지 최소한 반나절이상 수십 명의 공원을 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냥 가자’라는 순간의 오판이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초기에 진압하는 것과 상처가 여기저기 번질 만큼 번진 다음에 수습하는 것에는 내용적으로나 결과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제품의 패킹을 하기 전에 조금 더 신경을 써서 불량지퍼를 걸러냈더라면 납기는 하루 이틀 지연되었을지는 몰라도 고객의 클레임까지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불필요한 선적비용과 관세를 이중으로 지불하게 되었고, 이는 둘째치더라도 이제껏 P사와 어렵게 쌓아온 신뢰가 한 순간에 무너진 것은 셈할 수 없을 만큼 큰 손해였다.


돌이켜보면 이번 일은 ‘충분하지 못한 의사소통으로 야기된 예고된 인재’였다는 생각이 든다.

디자인팀은 핫라인을 통해 고객과의 충분한 의견조율을 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생산성이 고려된 디자인이 관철될 수 있도록 고객을 설득해야 한다. 실제 현장에서는 불필요한 장식이나 봉제를 바꾸는 작업 하나 만으로도 전체 납기를 수일씩 당길 수도 있다. 원활한 제품생산은 결국 고객에게도 득이 되어 돌아감을 알려야 한다.

자재파트는 실시간으로 디자인팀과 소요자재 및 일정을 협의하여 자재의 원활한 공급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조율해야 한다.

생산관리자는 공장의 공원이 어떻게 작업을 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생산의 문제점을 미리 발견하고 제품이 완성되어 선적될 때까지 품질을 확인하여야 한다.


덜떨어진 가방 하나를 만들더라도 완성되기까지는 조직의 안과 밖에서 무수히 많은 언쟁과 협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은 마치 눈과 귀를 막고 달려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을 게을리 하고, 자기 입장만을 염두에 둔 채 아집을 부려서는 조직이든 개인이든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

TV브라운관에서 고객의 눈을 사로잡았던 가방은 홈쇼핑 채널 쇼핑호스트의 화려한 손길을 거쳐 고객에게 전달되었다.

디자인에 매료되어 흡족해졌던 마음은 열리지 않는 지퍼를 당기는 순간 싸구려 저질가방에 대한 실망감으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고객의 실망은 사은품으로 받은 가방에 불쌍하게 매달려있는 지퍼에만 머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부 고객은 택배박스 안에 함께 들어있던 메인상품까지 싸잡아 원망하게 되었고, 마침내 반품이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핑계는 없었던 것이다.


요즘 고객은 갈대와 같다하지만, 홈쇼핑고객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여지없이 흔들린다. 화면을 통해 버튼으로 선택한 구매와 매장에 나가 인간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제품을 구매하는 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변심 또한 가볍게 리모컨을 누르듯 그렇게 순간적으로 일어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P사의 클레임이 있은 뒤, 우리는 담당자를 찾아가 A☓☓이 책임져야 할 부분을 최소화하기 위해 갖은 설득을 하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메인상품의 반품에 대한 손해배상은 우리에게 묻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될 듯하다. 만약 가방단가의 열배가 넘는 메인상품에 대한 클레임을 책임지라 했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 되었을 것이다.

반품 수량은 전체 물량의 40%수준에서 결정 되었다. 그래도 4,000개이다.

사무실을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수량이다.


판매취소로 인해 입은 손해는 둘째치더라도 이 거대한 물량을 어떻게 처치해야하는가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


L×를 다닐 때의 일이다. 대만에서 수입한 케이블모뎀을 전국에 판매했다가 부산지역에 납품한 제품에 이상이 생겨 수개월에 걸쳐 댁내에 설치된 케이블모뎀을 반품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매출 취소로 인한 마이너스 금액에 대한 손해보다는 반품에 소요되는 물류비용과 창고비용 그 외에도 이런 저런 명목으로 지출되었던 간접적인 손해가 비용이 몇 배는 더 컸었다.

그 때 ‘손해의 크기는 반품물량을 처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비례하여 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고스란히 우리 창고에 보관 중인 가방 4,000개에 대한 창고비용은 꺾인 택시 미터기처럼 정확하게 올라가고 있다.

가방은 계절과 유행을 타기 마련이다. 하루 이틀 시간만 보내다보면 철 지난 가방은 시장바구니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반품된 제품은 태생적인 장애를 갖고 있다.


신속한 처분을 위해 판매가격은 둘째치더라도 매입할 만한 거래처를 물색해보겠지만, 어쩌면 4,000개의 가방을 운동장에 쌓아놓고 불질러버리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경제적인 방법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운이 좋아 적당한 가격에 판매한다손 치더라도 하자가 있는 제품을 그대로 내 보냈다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처럼 개운치 못한 부담이 남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언제 누구에게 팔릴지도 모르는 가방에 나일론 지퍼를 다시 다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번 사건은 가방산업이 결코 녹녹한 비즈니스가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었다. 단 하나의 실수로 그 동안 피땀 흘리며 쌓아온 공든 탑이 잔인하게 쓸려 갈수도 있다.

우리의 잘못으로 납품된 제품을 철수하는 것은 우리는 물론 P사에게도 쉽게 잊혀 지지 않는 쓰라린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가 만든 제품으로 P사도 덩달아 고객의 매를 맞은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주저앉아 P사에서 쫓겨날 수는 없는 일이다. 차라리 수익이 안 맞아 우리 손으로 작별을 고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물러선다면 우리가 좋은 본보기가 된양 두고두고 업계에서 회자될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심기일전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몇 배의 공을 들이더라도 P사에서 실추된 신뢰를 다시 찾고 A××의 이미지도 새롭게 해야 한다.


얼마 전 과거 누나가 몸담았던 F社가 가방 내수사업에서 손을 띌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여부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사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F社처럼 실력 있고 기반이 탄탄한 회사마저 내수 사업에서 등을 돌릴 정도라면 국내 가방사업이 봉착한 난관이 어떠하리라는 것쯤은 가늠할 수 있다.

그들의 얘기대로 가방산업이 사양산업인 것인가? 네이버 국어사전에 보면 사양산업을 사회, 경제, 기술 혁신 따위의 형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쇠퇴하여 가는 산업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A××이 앞으로 어떤 자세로 비즈니스에 임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하는 일이 사양산업이 될 수도 아니면 첨단산업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사양기업은 있어도 사양산업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결국 조직이 어떻게 변화의 선두에 서서 스스로 변화하느냐에 달린 문제라 할 것이다. 


F社가 내수시장을 포기했든 아니든 우리가 그들이 선택한 길을 쫒을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놓여 있는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해 우리 길을 개척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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